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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의 여행/서울 여행

2014.11.4 서울 면접기 - 서울역사박물관

by ★☆ Mimi ☆★ 2014. 11. 4.

 

 

이날 오전, 서울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일명 : DDP) 유명하다 해서 가봤다가 허송 세월을 보내고

급히 근처에 동대문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시장 역시 광주에서 보던 양동 시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더군요.

(다만 규모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만 제외하면요.)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어디갈까 하다가 문득 떠오른 데가

서울 역사 박물관이라는 곳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개경(개성)이 수도였지만 조선 시대부터 한양(서울)이라는 도시가 수도로 변하는데요.

다시 말해 서울은 조선부터 맥을 이어온 오랜 역사와 전통이 숨어있는 곳이랍니다!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여러분은 수도 한양부터 서울까지 변천 과정을 그대로 볼 수 있어요.

 

 

 

 

 



 

 

 

이번 역사 박물관에 메인 주제는 성수대교 참사인가 봐요.

1994.10.21일에 우리나라 토목으로서 끔찍한 일이 발생했는데요.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뇌리 속에 성수대교 사건이 사라질 무렵이라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다시 상기시키고자 언급했나 봅니다.

(1995.6.29 상품백화점 붕괴)

물론 쉽사리 지나칠 수 있었지만 저는 토목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놓칠 수 없었어요.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국민들에게 아무런 유지 보수가 없는 무분별한 발전은 큰 위험성을 갖고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는데요.

위에 보이는 것은 성수대교 현황도입니다. 물론 서울시가 처음 계획을 잡고 수립할 때만 해도

성수대교는 정말 튼튼한 다리였습니다. 하지만 1979년 완공된 이 다리는 15년이라는 긴 시간 뒤에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구조물에 대한 붕괴를 생각치도 못 했기에 사람들은 다리의 붕괴 이후 큰 혼란에 싸이게 됐죠. 

 

 

 

 

 

 

 

 



버스에는 등굣길의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는데 찌그러진 버스에서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다리가 붕괴돼 떨어질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뒤에서 그들의 추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심정은 어땠을까요?

사고 당시 상황을 감히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버스 내에 24명, 도합 49명이 사상한 대형사고입니다.

 






 


 

 

 

물론 붕괴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성수대교는 트러스식 교량이었는데 시공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하고

방법 뿐 아니라 이음새 결함, 볼트 삽입 문제 등도 있었다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건설 이후 점검의 부실 문제였다 하네요.

 

이 사고로 인해 평범한 도로를 달리고 있던 아무 죄 없는 시민들의 안타까운 목숨이 허망하게 날아갔습니다.

거듭 생각할 수록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본격 역사 박물관을 구경할 거에요!

위의 모습은 역사박물관 시작과 함께 볼 수 있는 서울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가운데를 싸고 있는 성벽을 생각하면 옛 한양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경복궁 앞 광화문 거리에 놓여진 기다란 건물들을 통해  발전한 서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강남 지역은 자세히 안 나오더군요.)

 

 

 

 

 


 


 

 

태조 이성계 때 수도를 옮기려 했는데 기득권 세력과 의견이 맞물려 여러가지 말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그 때 수도로 거론됐던 곳에 대해서 언급을 했고

두 번째 사진은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진 다음 수도로 통하는 10개의 커다란 길에 대해서 나와있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이라는 나라의 심장인 만큼 모든 물품들은 한양으로 향해야 했나보죠?

문득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명언이 떠오릅니다.

 

 

 

 

 


 



이곳이 바로 광화문 정문 앞에 육조 거리라는 곳입니다.

육조 거리 동편에는 의정보,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가 있었고

서편에는 예조, 사헌부, 병조, 호조, 공조 등이 늘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중요 업무를 처리했던 부서들이 집중돼 있는 광화문 앞 이곳은 우리나라 핵심이라고 봐도 무관할 겁니다.


그 외에도 육조거리에서 더 남쪽에 있는 운종가(현 종로- 중앙에서 동대문까지 거리)에는 

각종 시전(육의전 포함)들 외에 점포가 모여 있어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역과, 의과, 음양과, 잡과 등 다양한 시험에 합격한 기술직 공무원들이 모여 살던 

청계천 근처의 중인촌이란 곳도 있었습니다.

한편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등 다양한 선비들이 살고 있는 남촌이라는 곳도

청계천 이남에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태극기는 우리나라가 개화를 시작할 때(1880)부터 언급돼 왔었으나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입니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 이후 우리는 임오군란에 의해 일본이 입은 피해를 사과해야 했습니다.

그 때 박영호가 처음 고안해 내 걸었다고 하는데요. 현재 우리나라 태극기와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건곤감리가 그려져 우리나라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 태극기가 맞구나 하는 확신을 들게 합니다. 


(참고)

1876 - 강화도조약

1881 - 신사유람단(일본), 영선사(중국) 등 파견

 1882 - 조미통상조약, 임오군란

1884 - 갑신정변


(건: 동, 곤: 서, 감: 북, 리: 남)

(건: 하늘, 곤: 땅, 감: 달, 리: 해)

(건: 인, 곤: 의, 감: 지, 리: 예)





 





 

 

태극기가 생겨난 후 많은 서양 강국들과 외교를 하며 우리나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여권이라는 개념도 생겼고 훈장 등 각종 기념물도 생기고 교과서도 신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변에 모든 것이 바뀌며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하나 둘씩 깨어나기 시작했죠.

그렇게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시대에 맞춰 성장해 나갈 듯하다가

 








 

 

문제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광무개혁이 있고 난 후부터 발생합니다.

이전까지는 별로 눈독 들이지 않던 조선에 대해 소련이 부동의 항구로서 갖고 싶어하자

소련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영국은 이를 저지하고자 지원을 해줄 조건으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지시합니다.

그로써 당시 광무개혁으로 성장하고 있던 우리나라를 일제 반지배하에 놓이게 했던 전쟁이 발발하는데요.

바로 서양 강국과 소련의 눈치 싸움 끝에 일어난 1904년 러일 전쟁이죠.


 (참고) 

1894 - 동학농민운동

1895 - 을미사변

1896 - 아관파천

1897 - 광무개혁

1898 - 황성신문 발간

 

 

 




 




 

1897 광무개혁 이후, 종로도 신식으로 변하고 사람들의 의복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전기 발전소가 생겨남에 전차도 들어서며 발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죠.

 하지만 1904년 영국,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이 승리하면서

묵시적으로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 것으로 돼 버립니다.

그 이후의 일들은 일본이 영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도 허용을 받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요.

(위는 그 당시 우리나라 사진입니다.)


(참고)

1904 - 한일 의정서, 러일 전쟁 영-일 동맹

1905 - 을사늑약,  가쓰라 테프트 밀약

1907 헤이그 특사 사건

1908 의병 서울 진공 작전

1909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사살, 간도 협약(일본 - 청)

1910 한일 강제 합병

 






 


 

 

이미 1896년 광무개혁 후 서울에는 대규모의 많은 일본인들이 건너 와 살게 됩니다.

그들은 분명 일본에서는 중하위 계층이지만 조선에 와서는 상위권으로 당당히 누리며 살았거든요.

그들은 주로 서울 남촌에 거주했고 북촌에는 본래 서울에 있던 한인들이 거주했는데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당연히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자국민이 거주하는 남촌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맨 위의 사진은 일본이 계획한 서울의 발전 모습입니다. 경복궁이 놀이동산으로 쓰인 게 안타깝습니다.)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무력통치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그냥 칼이나 총으로써 반대하는 세력을 밀어버리고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말이였지요.

그렇게 무력통치 하에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결국 봇물 터지 듯 들고 일어났던 것이 1919.3.1 운동입니다.

고종의 장례식 때 우리나라 전역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뛰어 나간 것이죠.

그리고 우린 깨닫습니다. 무력 없는 투쟁은 아니 된다고.

(이 사건 이후 중국에 임시정부를 만들고 무력투쟁을 하게 됩니다.)







 


 

 

또 중요한 점은 3.1 운동 이후 일본 정부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 틀려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을 쓰게 하고 가르치게 하는 것이죠. 또 우리에게 자유에 대한 일정 권리를 줍니다.

문화통치 시대가 열린 것인데요. 하지만 역시 그 위에 일본인이 있다는 것은 말 안해도 아시겠지요.

이는 1931년 까지 이어집니다.

(문화통치 시기에 추가적인 전차 노선이 뚫는 등, 자동차, 다방, 백화점 등이 생겨납니다.)







 

 

 

1931년까지 욕망을 감춘 일본은 마침내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만주에 대해 일본이 가짜 철도 폭파 구실을 세워 침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한 사건을 말합니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이 중국 전체를 짧은 시간에 먹으려고 무리한 전쟁을 말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세계 정복 욕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일본과 한국은 본래 하나다" 하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를 내세웁니다.

또한 우리 민족을 일본의 방패로 삼아 전쟁터에 뛰어들게 하죠. 

(양곡 공출제, 조선 징병령, 위안부 등이 일본의 만행입니다.)

 

 

 

 



 



그리고 1945.8.15 마침내 광복!!

그러나 광복이 되면 모든 것이 끝이 날 줄만 알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한에는 미군정, 북한에는 소군정이 들어와 1948.8.15 때 결국 통일 되지 못하고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고 만 것이죠.

1950.6.25 일명 625 전쟁이 발발하고 아무 것도 없는 폐허 속에서 민중들이 살아가다

61년 박정희에 군사정변 이후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서울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60년대 70년대 점차 증가하는 인구에 맞춰 교통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개의 고가도로와 하천 정비 등 다양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50년 중반까지만 해도 전차가 주 교통수단이었던 우리나라에서 이제 60년 중반에 들어서 차량이 많이 늘어남에 버스가 주 교통수단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서울에 74년 8.15에 첫 지하철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우리나라 서울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죠.

그리고 한강 이북에 땅이 부족해지자 여의도에 모래사장을 매립하는 등

강남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주된 시설들을 다 강남에 배치해 현재의 강남이라는 곳이 생겨난 것입니다.

(강남은 1970년 초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으나 그 때부터 각종 명문고를 이전시키고 혜택을 줌에 따라 부동산투기와 맞물려 부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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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 박물관은 우리 과거에 모습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좋은 곳 같습니다!

꼭 가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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