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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의 여행/서울 여행

2014.11.5 서울 면접기 - 국립중앙박물관 (2)

by ★☆ Mimi ☆★ 2014. 11. 5.





고려 경천사의 10층 석탑입니다. 총 높이는 13.5m 로서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하부가 두껍지 않은 채 하늘을 향해 위태위태 서 있는 모습이 참 매력적인 탑이었습니다.

아파트 대략 4층 정도 되는데요. 저렇게 높이 탑을 지을 정도니 고려의 기술력이 상당 수준에 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는 계급주의였던 신라의 전통을 깨기 위해 나온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경우 골품제에 의해 모든 것이 제한되는 나라였으나

고려에서는 그 모든 것을 부수고 사람들에게 더욱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한 나라지요.

그러나 고려 역시 신라시대의 연장선이다 보니 각 지방의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중앙국가의 행정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고려에서는 호족이라고 대우해주며 적으로 삼기 보다는 잘 달래어 아군으로 만들었죠.











고려 시대부터 역사책이 발급되었다니 놀랍습니다. (물론 역사책은 삼국 시대부터 쓰였습니다.)

호족들이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그 구역의 공물 수취 정도를 임의로 정할 뿐 아니라

각 군대를 거느리는 것은 물론. 그 지방의 법률 제정까지 그들의 역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각 지방에 왕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였죠.











나라가 점점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오락거리와 종교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둑이란 것을 두고 주사위라는 것을 만들어 각종 게임에 사용했죠.

게다가 고려 정부에서는 불교가 나라를 보호할 것이라고 불교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해줬는데요.

사람들은 더욱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불교 경전 해석에 따라 나눠진 종파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문서로써 배워야 한다는 교종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의 선종의 대립 등

고려시대에 불교 문화는 우리나라 불교와 관련된 보물 대부분을 장식할 정도로 꽃 피우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진하게 타오를수록 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물론 고려가 망한 이유는 원나라의 간섭 (약 1270~1350) 때문이기도 했지만 불교의 폐단적인 부분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고려 정부에서는 불교를 신봉하는 절에 대해 각종 혜택을 줬는데요. 이를 역 이용해 몰래 이익을 챙기는 절이 하나 둘 등장했으며

공양을 구실로 시민들에게 가혹하게 물품을 빼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말만 불교였지 갈취자 수준이었으니까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는데요.

그러면서 등장했던 게 유학 -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은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갖어 도덕적인 모든 것에 대해 규정하고

규정된 도덕을 따라 행실을 세우면 나라가 바르게 돌아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학문입니다.












드디어 조선시대 오면서 1446년 우리나라 글인 훈민정음이 세종에 의해 반포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세종대왕이 어려운 한문을 백성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한글이 실제 만들어진 이유는 한문을 좀 더 정확히 발음하기 위해서입니다.

(초기 훈민정음에는 점 등이 찍혀 강세와 발음 길이 등을 규정합니다.)


여튼 그 실제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현재 한글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이며

다른 어느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멋진 문자인걸요!










어쨌든 조선이라는 나라는 초기에 개국에 도움을 줬던 훈구파 세력에 의해 잘 크게 됩니다.

그러나 점차 조선이란 나라가 커지고 훈구파에 의한 완벽한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초야에 묻혀 공부를 하던 사림파가

과거를 통해 등용되기 시작했는데요. 이렇게 사림파가 훈구파 세력을 압도할 즈음에 조선이라는 나라에 큰 전쟁이 발발하니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1592)입니다.

(흔히 이 전쟁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모든 농토와 집터들이 불탑니다.

전쟁 후, 정부는 전쟁 전처럼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둘 수 없었죠.

오히려 세금을 거두려 하자 농민들은 논과 밭을 버리고 도망가기 일 수 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농민들을 다시 논과 밭으로 불러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농민들의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영정법(1635)입니다.

 

영정법은 전에는 땅의 가치에 따라 다른 세금을 매겼으나 임진왜란 이후 

농민에게 세금에 대한 부담을 지워주기 위해 모든 토지의 똑같은 면적에 최소 세금을 매기는 조세 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특산물에 대해서 폭리를 취하는 지방관을 견제하기 위해 각지 특산품을 쌀로 대신하는

대동법(1650)이라는 것도 시행하고 균역에 비리를 없에기 위해 균역법(1750)이라는 것도 시행합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특산품을 중앙으로 배달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한편 대동법으로 인해 점차 쌀이 돈과 같은 개념으로 변하는데요. 

조선 정부에서는 이를 장려해 민중들이 좀 더 편하게 화폐 개념을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동전이라는 것을 착안하게 됩니다. 바로 상평통보(1680)입니다!


(물론 고려시대 숙종(1100)부터 해동통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개경 내에서만 이용될 뿐이었는데요.)

(그에 반면 조선시대 숙종(1680)에 주조된 상평통보는 전국으로 퍼지게 됩니다.)

(대동법은 1608년에 최초 실시되나 지방관의 거센 반발로 1680년 이후 전국에 퍼집니다. )











한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점점 발전하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엉성했던 바둑알도 점점 규격에 맞게 발전하고 주사위도 정확한 6각형 모양으로 우아하게 만들어지더군요.

물론 지금 현재에 비해서는 턱없이 멋이 없고 부족하지만 고려에 비해서 아주 세련된 모습입니다.











17C에 농민을 위한 구제 법들이 대부분 나왔다면 이제 18C에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가 막바지로 가기 전, 당파에 의해 정치가 퇴폐적으로 변한 모습을 바로 세우기 위해

탕평책(왕이 옳고 그름에 대해 적극적으로 판별하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16C에는 이황의 영남학파 (동인) 이이의 기호학파(서인)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이뤄집니다.)

(서인이 집권한 후 예송논쟁, 노론과 소론이 나온 것은 17C입니다.)

(18C 이전까지는 성리학 외에 모든 학문을 천시해 그 외 학문은 발전이 거의 없었으나 정조 시대에 실학 외의 학문이 놀랍도록 발전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근대로 탈바꿈 하는 시기에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니...

그 잘못이란 바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에 의해 정치가 좌지우지 돼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 이해관계에 따라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조선의 사회는 썩을 대로 썩게 됩니다.

(약 1800~1860) 19세기 초반은 서양에서 산업혁명(18C 중) 을 마치고 자신의 수출품을 팔기 위해

식민지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는데요.

서양 강국의 영향력은 점점 그들의 본거지에서 중국 대륙을 지나 일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세기에 중국은 아편 전쟁(1840)을 통해 문물을 개방했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 (약 1870~1890) 을 통해 문물을 개방했습니다.

그런 그 시기에 우리나라는 세도정치에 의해 나라가 휘둘리게 되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더욱 폐쇄적으로 변함으로써

더욱 문물 개방이 느려지고 나라의 발전이 느려졌죠.










그 이후로는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시나리오가 진행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부터 1910년 강제합방, 1945년 대한 독립 만세까지...

위의 사진은 우리나라가 막 문물을 개방했을 때 들여온 전화기 사진입니다.

다이얼을 돌리는 방식이 옛날 전화기를 연상케 하네요.











국립 중앙 박물관의 정문 근처에 기하학적으로 서 있는 또 다른 박물관 - 국립한글박물관이 있더군요.

물론 발은 피곤하고 편히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가보겠나요?

저는 무거운 발을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신라 시대에 우리나라는 향찰 표기법을 썼습니다. 중국 한자에 음과 훈을 빌려 적용했던 거죠.

(때로는 음을 쓰고 떄로는 훈을 적용했으며, 우리가 쓰는 문장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이두라는 표기법이 등장하고 마침내 한글이 등장하게 되죠.

(이두도 음과 훈을 빌리는 것입니다.)


한글 박물관에서 우리는 이두부터 한글까지 우리나라 글에 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국립 한글 박물관에 대해서는 언급할 게 없네요.

그도 그럴 것이 생각보다 작았거든요.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있으니 후식으로 한번 들려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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